고대 그리스 문명의 운명은 어쩌면 이 ‘역병’이 바꿨을지 모른다[전문가의 세계 - 김응빈의 미생물 ‘수다’]

 (48)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장티푸스



거리를 걷다 보면 ‘○○ 폴리스’라는 이름이 붙은 건물이 종종 눈에 띈다. 본디 폴리스(polis)란 기원전 10세기 무렵부터 그리스 지역에 들어서기 시작한 도시국가를 이르는 말이다. 산이 많고 평야가 적은 지형 특성상 고대 그리스인들은 해안 가까이 있는 평지를 중심으로 정착했다. 그런 다음 정착촌 방어를 위해 높은 언덕에 성이나 요새를 쌓았는데, 이것이 폴리스로 발전했다. 비록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폴리스들은 공통 언어와 종교를 바탕으로 동족 의식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4년마다 올림피아 제전을 열어 민족의 결속력을 키웠다. 잘 알려진 대로 오늘날 세계인의 축제인 올림픽이 여기서 유래했다.

기원전 5세기 즈음 페르시아가 소아시아에 있는 그리스 식민 도시를 병합해가는 과정에서 세 차례에 걸쳐 그리스·페르시아 전쟁(기원전 492년~기원전 448년)이 일어났다. 전쟁 막바지에 아테네 주도로 여러 폴리스 대표가 에게해에 있는 섬 델로스에 모여 ‘델로스 동맹’을 맺었고, 이는 최종 승리로 이어졌다. 종전 후 아테네는 델로스 동맹을 주도하며 강력한 해상국가로 발전해나갔다. 이 시기 아테네에서는 페리클레스라는 걸출한 인물이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아테네와 함께 그리스의 투톱으로 군림하던 스파르타는 공동의 적이 사라진 상태에서 세를 키우는 아테네가 영 마뜩잖았다. 애당초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여러 폴리스 가운데 리더 자리를 두고 각축하던 사이였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숨은 지배자

아테네·스파르타 전쟁의 역병
그 ‘정체’ 두고 수세기를 논쟁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기록엔
장티푸스와 유사한 증상 담겨

아테네는 해군력을 바탕으로 지중해와 에게해 연안 지역 해상 패권과 무역 항로를 차지하고 부를 축적했다. 반면 육지에 기반을 둔 스파르타의 힘은 강력한 육군에서 나왔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자주 그려지는 것처럼 스파르타 군대는 무적 전사 집단이었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사이의 힘겨루기는 마침내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기원전 404년)으로 폭발했다.

그런데 펠로폰네소스 전쟁에는 보이지 않는 복병이 있었다. 이른바 ‘아테네 역병’으로 알려진 전염성 감염병이다. 전쟁 발발 1년 후 아테네를 엄습한 이 질병은 4년 동안 아테네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실증적 역사 서술로 유명한 고대 그리스 역사가 투키디데스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에 기록한 바에 따르면 아테네 육군의 3분의 1과 민간인 4분의 1이 고열과 구토, 설사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다. 아테네를 이끌던 페리클레스마저도 병마를 피하지 못했다.

아테네 역병의 정체를 두고 역사학자와 의학자들이 수세기 동안 논쟁했고, 이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이렇게 오랫동안 헛바퀴를 굴리는 가장 큰 이유는 미생물학적 또는 병리학적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학자들은 20세기까지 거의 전적으로 투키디데스가 남긴 기록을 바탕으로 아테네 역병을 페스트, 인플루엔자, 장티푸스, 천연두, 발진티푸스 또는 홍역 등으로 제각기 추정하며 갑론을박을 벌여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그 당시 역병 상황을 전해주는 유일한 기록물이다. 투키디데스 자신도 그 병에 걸렸기 때문에 그 증상을 체험한 상태에서 주변 사람들의 징후를 관찰할 수 있었다.

비록 의사는 아니었지만, 투키디데스는 신중한 관찰자이자 역사가, 그리고 환자로서 최대한 적확한 용어를 선택해 병의 징후를 묘사했다. 그런 노력 덕분에 아테네 역병의 주요 특징을 세세하게 기록했음이 분명해 보인다. 따라서 투키디데스를 통해 역병의 정체를 밝혀내려면, 그가 서술에 사용한 용어를 정확하게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예컨대 ‘역병(plague)’이라는 단어는 특정 병명이 아니라 심각한 유행병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용어였다. 투키디데스의 기록을 언어학적, 임상학적, 역학적으로 종합 분석한 결과, 일단 아테네 역병이 호흡기 관련 질환일 가능성은 희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아테네 역병의 정체는?

현대 ‘코로나 PCR’ 검사와 같은
2006년 ‘고유전체학’ 기술 동원
고대 유골서 장티푸스균 발견
정체 규명 연구에 새 전기 맞아

21세기 들어서 아테네 역병의 정체를 규명하기 위한 연구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고유전체학(paleogenomics)’이라는 바이오 기술이 동원되면서 안개를 걷어내기 시작한 것이다. 고유전체학은 화석과 유적 따위에서 얻은 DNA를 분석해 먼 옛날에 살았던 생명체의 유전적 특성을 알아내는 일종의 ‘유전자 고고학’이다. 이 신기술의 핵심은 요즘 코로나19 진단검사 원리와 같은 PCR 검사법이다. 2006년 그리스 아테네대학교 연구진이 고대 그리스인이 사용했던 공동묘지에서 발굴한 오래된 인골 치아에서 DNA를 추출하는 데 성공했다. 이를 대상으로 연구진은 그동안 제기되었던 병원체 일곱 가지를 탐색했다. PCR 검사 결과 모두 음성이었고 장티푸스균 유전자만 증폭되었다.

투키디데스의 서술에 따르면, 환자는 심한 두통에 시달렸으며 눈이 충혈되고 입에서 피가 났다. 이어서 기침과 콧물, 가슴 통증이 따라왔고 구토와 설사로 고생했다. 또한 피부 발진이 생겼고 정신을 잃기도 했는데, 보통 발병 후 약 일주일 뒤부터 사망자가 나왔다고 전해진다. 일반적으로 장티푸스 환자에게서 나타나는 증세와 상당히 유사하다. 이런 사실을 토대로 연구진은 장티푸스를 아테네 역병으로 지목했다. 이들은 한발 더 나아가 2013년에는 아테네 역병이 스파르타가 저지른 바이오 테러로 시작되었다는 주장을 담은 논문을 발표했다.

아테네와 가까운 항구도시 피레우스에 있는 저수지에 ‘펠로폰네소스 동맹’ 소속자가 독을 넣었다는 이야기가 있다는 투키디데스의 기록(<펠로폰네소스 전쟁사> 제2권 48)과 아테네에서 역병이 갑자기 발생했다는 사실을 결부한 것이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이란 스파르타를 맹주로 하는 펠로폰네소스 반도 폴리스들의 군사 동맹이다. 투키디데스에 따르면 이 역병은 에티오피아에서 시작되어 이집트와 리비아를 거쳐 그리스 지역으로 왔는데, 가장 먼저 발병한 곳이 피레우스였다. 투키디데스는 피레우스에 우물이나 개천이 없었다고 했다. 이는 식수원 오염에 매우 취약한 환경임을 암시한다.

스파르타의 막강한 육군력을 익히 아는 아테네는 전쟁 초기부터 변방 지역을 포기하고 아테네 도시 성곽 안에서 대항하는 방어전략을 택했다. 적군을 피하려고 많은 사람이 아테네 도시 안으로 모여들었다. 이렇게 해서 아테네는 감염병 확산에 최적의 조건인 과밀과 비위생적인 환경을 갖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의로든 우연히든 식수원이 병원균으로 오염되면 삽시간에 대유행으로 번지고 만다. 투키디데스가 기록한 아테네처럼 말이다.

미생물학적으로 보면 감염병이란 미생물이 숙주의 몸에 들어가 증식하는 과정으로 인해 숙주에게 나타나는 이상 현상이다. 병원체가 숙주에게 주는 피해의 정도는 면역 수준에 따라 다르다. 면역에는 유전적 요소가 크게 작용하지만 영양 상태와 스트레스, 환경 요인도 무시할 수 없다. 병원체 입장에서 나쁜 영양 상태로 심한 스트레스에 눌린 사람들로 들어찬 기원전 430년 아테네는 다양한 먹잇감이 즐비한 뷔페나 다름없었다.

장티푸스라는 이름의 유래

병 명확한 구분 어려웠던 1829년
티푸스와 유사 ‘장티푸스’ 명명
1839년 ‘오염된 물로 전염’ 밝혀

역병에 극도로 열악했을 아테네
만약 전염병이 아니었다면…?
고대 그리스 역사는 달라졌을까

장티푸스는 그 이름이 암시하듯이 장에 세균이 침입해서 생기는 감염병이다. 그런데 발진티푸스를 줄여서 부르는 티푸스와 이름이 비슷해서 두 병을 헷갈리기 쉽다. 이렇게 혼동을 주는 이름이 붙은 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다. 17세기 중반, 영국의 저명한 의사이자 해부학자 토머스 윌리스는 발열과 반점 등 겉으로 나타나는 증세는 티푸스와 비슷한데, 부검에서 소장에 궤양이 발견되는 질병을 확인했다. 그는 이를 ‘티푸스 유사질환’이라고 불렀다. 참고로 윌리스는 탁월한 뇌 해부 연구 업적으로 신경학의 아버지라 불리며, 당뇨병 환자의 오줌에서 단맛이 난다는 사실을 최초로 간파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오늘날 사용하는 ‘장티푸스(typhoid)’라는 병명은 1829년 피에르 찰스 알렉상드르 루이라는 프랑스 의사가 만들었다. 그는 ‘발진티푸스(typhus fever)’를 줄여서 부르는 ‘티푸스’에 ‘비슷한’이라는 의미를 지닌 접미사 ‘-oid’를 붙였다. 아직 발진티푸스와 장티푸스를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었던 시절이라 이런 얄궂은 작명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그 당시 루이 밑에서 공부하던 영국 의학도 윌리엄 버드 역시 장티푸스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영국으로 돌아와 의대를 마친 버드는 1839년, 장티푸스가 환자의 분변으로 오염된 물을 매개로, 즉 ‘대변-경구 경로’를 통해서 전염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논문으로 발표했다. 그로부터 40년 후 장티푸스균이 처음으로 관찰되었다.

장티푸스를 일으키는 살모넬라균(빨강색)이 실험실에서 배양된 인간 세포를 공격하는 모습을 포착한 전자현미경 사진. 로키마운틴연구소·NIAID·NIH 제공


1879년 독일 출신 병리학자 카를 에베르트가 장티푸스로 사망한 환자의 비장과 장간막 림프샘(임파선)에서 막대 모양의 세균을 발견하고 이듬해 그 결과를 발표했다. 이후 여러 세균학자가 에베르트의 연구 결과를 연이어 확인했고, 마침내 1885년 미국 농무부 소속 연구진이 돼지콜레라로 죽은 돼지 창자에서 장티푸스균을 분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1900년 장티푸스균에 ‘살모넬라(Salmonella)’라는 공식 명칭, 학명이 부여되었다. 살모넬라는 연구진을 이끌었던 동물 병리학자 대니얼 새먼(Daniel Salmon)의 성에서 유래했다.

마침내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승리한 스파르타는 고대 그리스 일인자 자리에 올랐다. 그러나 이내 내분이 일어 혼란을 겪다가 기원전 338년에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 알렉산더 대왕의 아버지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찬란했던 그리스 문명의 종말을 알리는 징조였다는 게 역사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아테네는 극도로 열악한 상황 속에서도 오랫동안 스파르타와 대등하게 맞섰다. 이를 바탕으로 만약 역병이 아니었다면 펠로폰네소스 전쟁 기간도 훨씬 더 짧아지고 승패도 바뀌었을지 모르겠다는 상상을 해본다.

김응빈 교수



1998년부터 연세대학교에서 미생물을 연구하며 학생을 가르치고 있다. 연세대 입학처장과 생명시스템대학장 등을 역임했고, 지은 책으로 <미생물과의 마이크로 인터뷰> <술, 질병, 전쟁: 미생물이 만든 역사> <온통 미생물 세상입니다> <생명과학, 바이오테크로 날개 달다> <미생물에게 어울려 사는 법을 배운다> <나는 미생물과 산다> 등이 있다. 또한 유튜브 채널 ‘김응빈의 응생물학’과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 파트너 채널 ‘김응빈의 생물 수다’를 운영 중이다. 유튜브 채널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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